urgent & important
personal work
긴급하면서 중요한 일
나는 기억이 다 안나. 초등학교 동창 나연이가 고시 공부를 하지 않았느냐고 걔 안부를 물어오는데 내가 신기해서 엄마한테 또 그런다. 엄마는 그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하고 살어. 재작년에 한 번 와 봤던 교회 사람들 얼굴들이나 기차가 무엇 때문에 연착이 됐는지 언제 그 골목에서 어떤 걸 먹었는지 등등 나는 이제 (또) 기억나지 않는 것들을 엄마는 마치 어제 일인 양 술술 얘기한다. 내 태몽은 뭐였어, 엄마, 하고 물으니 별거 다 기억하는 사람이 딸 태몽은 기억을 못 한다. 그건 네가 기억해야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기억해. 할머니가 꿨다고 그러지 않았어? 맞다. 할머니가 해변에서 사과를 주웠대. 사과 줍는 꿈 되게 흔한 딸 태몽 아닌가? 큰 사람이 될 게 아닌가 부지. 그런가.
몇 년 전에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어제 일처럼 모두 다 기억하는 애를 한 명 더 알고 있다. 나는 걔가 과거에 살고 있다 생각했다. 목표 없이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애도 한 명 알고 있다. 걔는 미래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녹영이는 내 사는 방식이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다고 말 한 적 있다. 작년에 읽었던 여름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린다. 스무 살 적 나에게 지금만큼 강렬한 순간이 없다고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본다. 나는 전보다 더 강렬하게 느끼고, 사무치게 다가가는 것 같다. 그것만큼 내게 의미 있는 순간은 없는 것 같아. 김세린은 어제도 모르고 내일도 모르지만, 오늘의 끝에는 어디든 가닿지 않을까. 길을 잃는 꿈을 자주 꾼다. 길을 잃었는지 알 수 없이, 나는 그저 걷기만 하는 꿈. 꿈일지, 아님 현실일지 모르겠는. 눈을 감아도 대낮만 끝없이 길게 늘어진 것만 같은. 그런 날. 그런 여름. 매년 그랬듯이.
건조한 티비 소리. 물에 밥 말아 먹기. 짭조름한 오이지. 커피 봉지 두 개 넣은 아이스 라떼. 이모부 이야기. 창고. 짐 짐짐. 한 보따리. 긴 산책. 삼십구도. 모터가 다 보이는 선풍기. 리차드 집 정원에서 따온 체리. 현상되지 않은 필름. 그래. 이 정도면.
집에 오자마자 목을 캑캑 거리고 재채기를 해대면서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버젓이 잘 살아온 나를 무안하게 하더니, 엄마는 이 집을 아주 끝장을 내버리려는지 며칠 내내 새벽부터 저녁까지 벗기고 쓸고 묶고 버리고 뜯고,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집 청소를 하듯 했다. 정말 엄마의 집으로 만들려는 것처럼 야금야금 이 집을 다 뜯어놓더니 오늘은 정원에 있는 잡초 풀들까지 다 뜯어버렸다. 엄마는 나도 집처럼 여기저기 청소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정말 그러려고 석 달이나 있겠다고 한 것 같았다. 먼지 쌓이고 버릴 것이 쌓인 이 집구석이야말로 내 1년의 세월을 대변한다 굳게 믿는 것처럼 그녀는 나의 모든 일상을 나무랐다. 아침부터 나를 깨워서 레몬과 파슬리를 간 걸 컵에 따라 주더니, 몸에 독소를 없애야 살이 빠진다면서 5일을 마시라고 했다. 엄마는 문득문득 그랬다. 나는 큰 집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믿으면 편한데, 왜 굳이 돌아 돌아 멀리 가느냐고. 단순하게 살면 어디가 덧나느냐고. 엄마가 온 지 사흘 만에 크게 싸우고, 다 필요 없으니 집에 다시 돌아가겠다는 그녀에게 교회는 가겠다고 우물쭈물 말하고 나서야 엄마는 잠시 멈췄던 청소를 다시 시작했다.
M은 39도 날씨 땡볕에 검정 후드집업을 입고 역에서부터 걸어왔다. 그늘도 없어 아지랑이가 풀풀 올라오는 돌바닥을 걸을 때도, 집 안에도 더운 기가 안 가셔 우리는 거의 훌러덩 벗고 있는데도, 자기는 이만하면 시원하다고, 오히려 춥다면서 기모 후드를 고집하고 있길래 그냥 너도 진짜 특이하다, 하고 말았었는데, 이틀째 되는 밤 M은 내게 손목에 있는 흉터를 보여줬다. 티 많이 안 나나요, 하고. 그때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M이 그랬다. 컴퓨터로 그려진 사람이 실제 사람보다 좋은 이유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그 그림은 상처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M은 세상이 온통 다 아파서, 그래서 아무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대신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는 왜 우릴 사랑하지 못할까. 그러게 말이에요. 끝이 없는 얘길 돌려 돌려 하던 밤이었다.
엄마가 틀어달라고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막 태어난 아기가 울고 있는데 나도 눈물이 막 났다. 그 벌겋고 작은 몸뚱이가 응애 응애 울부짖는 소리가 나는 어쩐지 너무 무섭고 까마득한데, 동시에 너무 눈부시고, 아름답고 강력해서. 심장 소리처럼 규칙적인 울음소리가 잔뜩 불은 아기 입에서 터져 나오는데, 빨간 핏덩이 같은 애가 터뜨리는 생명력이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해서. 무슨 꿈을 꾸고 태어났건 사과를 줍는 꿈을 꿨건 뭐건 그냥 참 예뻐서. 혼자서 아, 나도 살 수 있겠다, 이겨낼 수 있겠다, 그랬다. 너도 그랬으면, 조금은 덜 아팠으면, 그냥 그랬다.